.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사IN] '숨은 신’의 이면 파헤쳐 식민사관 극복하기 / 이명원 (문학평론가) 본문
김윤식 교수는 스스로 자신을 ‘벤허선의 노예’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는 ‘필사적으로’라는 표현에 걸맞게 한국 근대문학과 비평의 현장에서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다. 비유컨대 그에게 ‘근대’란 ‘숨은 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에 대한 열망이 크고 높을수록,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은 넓고 깊었을 것이다.
논문과 대담을 모은 김윤식의 <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는 일종의 자전적 고백의 성격도 띠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와도 같은 현실 속에서, 그가 어떻게 제로 상태의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매진할 의지를 다질 수 있었는지, 또 그 학문적·비평적 실천의 야심은 무엇이었는지를 이 저작처럼 성실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다.
이 책의 여러 논문에서 그는 근대문학 연구를 향한 집념의 뿌리에 ‘식민지 사관’의 극복이 있었음을 밝혔다. 그는 식민지화를 가능케 한 ‘근대’의 성격과 이념에 대한 지적 탐구 경로를 밝히는 한편, 오늘의 중진 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한 한국의 정치경제학적 현실 속에서 왜 ‘소설’에 대한 관심이 ‘글쓰기’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논의한다.
소설이야말로 역사적 근대에 조응하는 미학적 양식이었다는 것. 이는 그가 선용하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이론이거니와, 오늘과 같은 말기 근대의 성격 변화와 인간적 위엄을 상실한 시민계층의 속물화는 그 미학적 결과로 소설 양식의 쇠락을 초래할 것이다. 1991년 이후의 현실에서 그는 이것을 ‘인간은 벌레다’라는 명제에서 찾았고, 이것이 소설 양식의 쇠락을 대체한 ‘글쓰기’에 대한 탐구로 그를 이끌어, 다시 일제 말기와 광복 공간의 ‘글쓰기’를 야심차게 조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후학의 처지에서 보면, 김윤식의 ‘근대’에 대한 시각 역시 또 다른 비평의 대상이다. 가령 그의 ‘근대 공부’에 충격을 가한 로스토의 <경제성장의 제 단계> 등을 포함한 근대화 이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 한 예다. 로스토의 근대화론은 김윤식은 물론 1960년대 학계에서 ‘근대’를 조망하는 유력한 프리즘 구실을 한 것이 사실이고, 일정한 학문적 성과는 물론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 원천으로서 실질 효과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로스토의 근대화론이란 실제로는 제3세계에 대해 미국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정책 프로젝트의 하나로 기획한 기술합리적 통치담론(정일준)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가치중립적 보편담론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동시에 분단 이후 남북한 문학사를 기술하는 데 ‘원리적으로’ 통일문학사론은 불가능하다는 시각 역시 논쟁의 뇌관을 품고 있는 주장이다.
---
김윤식에 대해 솔직히 잘 알지는 못한다. 얼치기이나마 제대로 문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기에 문학도를 자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반 독자로써 그의 책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그의 칼럼을 몇십 편 보고 강연을 한 번 들은 것이 전부다. 그래서 가타부타 평을 할 처지가 못 된다. 그저 '신기하다'는 말 정도 밖에는. 일단 그의 문체가 신기하고, 사실 본질적으로는 육체적 노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정적인 집필을 계속하는 것이 더욱 신기하다. 게다가 이 글을 쓴 이명원에 의해 잘못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정적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근대를 초극하려고 노력한 김윤식 정도라면, '존경'의 대상으로 고려해봄직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