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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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 Review

[영화] Batman Is Back! <★★★★☆>

zeno 2008. 8. 1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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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트맨이 돌아왔다. 가장 음울한 슈퍼히어로,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영웅 배트맨이 돌아왔다. 'The Dark Knight'라는 이름과 함께.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간지폭발인 수트를 입고 점점 진화하는 배트카와 바이크를 몰며 고담을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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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The Dark Knight'(이하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Joker(이하 조커)다. 'Why So Serious?'로 요약되는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 '자경단' 배트맨이 지켜온 고담을 뒤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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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께가 3cm는 될 듯한 얼굴 화장에 괴기한 색감의 수트, 겉옷 안에 장치한 폭탄들, 정작 주요 무기는 칼, 인 조커의 존재는 배트맨에게 당혹스러울 뿐이다. 그야말로 그는 '미친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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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번 바뀌는 과거사를 늘어놓으며 실실 쪼개는 조커의 존재는 고담을 뒤흔들어 놓는다. 조커가 선언하지 않던가. '고담은 이제 내꺼다'라고. 하지만 언뜻 보이는 조커의 눈빛은 슬프다. 그러나 관객이 그를 동정할 틈도 없이 그는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영화 역시 조커가 같은 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가 살인을 일삼는 이유는 딴 것이 아니다. 배트맨을 직접 대면하는 것, 그래서 그를 처참하게 몰락시키는 것.
  자신이 지키려던 고담의 질서와 정의가 한 미친놈에 의해 유린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브루스 웨인에게 그야말로 고문이다. 그가 그토록 지키려던 고담의 시민들이 조커의 선동에 놀아나 배트맨을 욕하고 저주하다니 이건 물에서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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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 나이트가 단순히 '악'을 상징하는 조커와 '선'을 상징하는 배트맨의 대결만으로 채워진 영화였다면 이 진부한 할리우드 영웅 영화의 공식은 결코 대중의 미칠듯한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입체적인 하비 덴트의 존재 역시 그 하나로 평가받을 만 하다. 물론 이 같은 구도가 영화사상 처음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하비 덴트가 '투 페이스'가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뿐만 아니라 고담 시의 대부호 브루스 웨인까지 'I Believe in Harvey Dent'라고 밝힐 정도로 하비 덴트의 존재는 말 그대로 'The White Knight'이다. 암흑 속에 숨어 자신의 몸과 첨단 기술력만을 믿고 범죄와 싸워야 하는 '다크 나이트' 배트맨과 달리 하비는 법이라는 든든한 무기를 갖고 떳떳하게 적과 결투를 벌일 수 있는 '화이트 나이트'다. 그가 부임한 후 1년 동안 범죄자의 절반이 소탕되었다는 설정은 그의 역할을 더욱 부각시킨다.

  허지웅은 이 세 캐릭터가 각자 자신의 '평등'을 위해 싸운다고 적었다. 필자에게 그들은 각각의 시대인을 상징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배트맨은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비록 낮의 브루스 웨인은 대자본가로 미녀들과 즐겁게 노니는 인물일지라도, 밤의 자경단 배트맨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결코 사람은 해치지 않는 선의 사도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운명 - 고담의 정의 실현 - 을 달성하고자 하는 그는 제도권 바깥에서 자신의 저작으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근대 계몽주의자의 전형이다.

  화이트 나이트에서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심판자 투 페이스로 변하는 하비 덴트는 쇠락한 근대 계몽주의자를 상징한다. 하비가 화이트 나이트였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제도권 내에서 정의와 선을 실현하는 '총아'였다. 하지만 그가 사적 감정에 매몰되어 - 근대 계몽주의에서 '도덕'이란 이름으로 숨길 것을 강요당했던 - 고담을 포기하고 동전에 운명을 맡기는 투 페이스가 되어 복수를 시작하면서 그는 근대 계몽주의의 틀을 벗어던진다. 하늘 너머 높은 곳에 있던 그는 지하 세계의 더러운 미물의 수준으로 내려와 사적 기획을 진행한다. 어차피 자기로부터 모든 것 - 그에게는 연인 '레이첼' - 을 앗아간 세상 따위 망해버리라는 식의 그의 태도는 잘 나가던 사상가가 세상의 긍정적 변혁이라는 고매한 이상이 아닌 파괴적으로라도 완전히 전복되길 바라는 저열한 욕망의 노예가 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라고, 그토록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과거의 영웅은 디스토피아를 이끄는 아수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계몽주의를 당황케하고, 나아가 부숴버리기까지 하는 조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게 한다. 근대의 이분법적 구도는 더 이상 조커에게 유효하지 않다. 거대 담론으로 미시의 목을 졸라 버리는 근대의 문법은 폐기대상일 뿐이다. 조커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배트맨을 괴롭히고, 하비 덴트를 투 페이스로 이끈다. Why So Serious라며 끊임없이 근대인을 당혹시키는 조커의 말은 그만큼 마력적이다.

  기존의 체계를 뒤흔들어버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는 유효하다. 왜 관객들이 부활한 조커에게 열광하겠는가? 단순히 가인박명의 운명을 따라간 히스 레저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만큼 근대를 탈피한 조커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던 탓이다. 고리타분한 선과 악의 이분법에 갇혀 어쩔 줄 모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을 판단하는 따분한 배트맨은 더 이상 어필하지 못한다. 근대적 영웅의 궤도를 잘 따라가다가 단순한 동기 하나로 악의 화신이 되어버리는 투 페이스도 삽시간에 매력을 잃어버린다. 조커 역시 매력 덩어리 영웅은 아니지만, 답답한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런 악당 캐릭터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 담론이 개인들을 질식시키는 오늘날에 Why So Serious라고 외치며 스마일을 강조하는 조커는 한 줄기 해방구와 같다. 심각함을 던져버리라니, 이 아니 좋을쏘냐!

  하지만 그래서 조커는 위험하다. 모든 거시 변수를 미시 변수로 치환시키는 것만으로는 세상의 구조적 문제는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개인이 무거움을 벗어나려고 해도 틀이 바뀌지 않는 한, 정해진 운명은 운명의 의무를 다한다. 오히려 Why So Serious라며 방황하는 개인들을 선동하는 거짓 선지자의 존재는 구조적으로 억압된 이들의 운명을 존속시키는 보수주의자들의 농간일 수도 있다. 조커 역시 배트맨의 제거를 조건으로 고담의 악의 근원, 갱단들과 손잡지 않던가? 그래서 요 근래 유행하는 Why So Serious의 물결이 조금은 우려된다. 가볍게, 더 가볍게를 추구하며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20대의 모습이 조커를 닮지는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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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근대는 유효하다. 혹은 적어도 잔존하고 있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 사이에 고든이 존재하듯, 삼각형의 구도로 안정된 사회 개혁의 가능성은 근대 계몽주의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타락했지만 잘만 활용하면 힘이 될 수 있는 제도권의 권력을 가진 고든은 쇠락의 가능성이 높은 만큼 완벽한 양지의 영웅과 직접적인 파괴력은 떨어질지라도 없으면 반드시 표가 나는 음지의 영웅을 이어준다. 자칫 상극이 되기 쉬운 화이트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는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합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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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 나이트는 다크 나이트를 필요로 하는 기성 권력의 절박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먼저,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왜 이 빌어먹을 고담은 배트맨 따위 무법자가 없으면 안 되는거지?' 하지만 안도감도 들었을 거다. 고독한 영웅은 힘든 법이니까. 아무리 연이니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하더라도 이상이 현실화되지 않는 한 힘들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도 들었을지 모른다. 고담의 범죄만 소탕되면, 무법자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박쥐인간 따위 제거해버리겠다고.

  알 사람은 알다시피 다크 나이트의 귀결은 다크 나이트다. 서사 구조는 완결되지 않고, 답답함은 가시지 않는다. 영화 내내 관객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차후에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속편이나 원작 만화 등을 보지 않는 한 섣부른 결론은 금물이다. 다만, 근대와 탈근대의 묘한 조합을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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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 이런 메기 질렌할이 예쁘지 않다는 허지웅은 뭥미? 눈이 그리 높아서야. ㅉㅉ
       이 누나가 데이트 하자 그러면 당장 오케이다.

  덧 2. 사실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은 숨막힐 정도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다크 나이트란 텍스트는 어렵게만 다가왔다. 그래서 이런 글을 짧게라도 써야지 싶었다. 결코 이 글에 만족하지는 않다. 다만, 잊기 전에 단상이나마 정리해 두는 정도에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DVD가 나오면 살 것이다. 그래서 보고, 또 볼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다크 나이트는 '걸작'이자 하나의 '텍스트'다. 정의가 과연 승리하는가, 라는 탈근대적 관점에서부터 다크 나이트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본래 이 글은 이것보다 짧게 쓰려고 했다. 도무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쓰다보니 이렇게 얼기설기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차후에 다른 관점에서 분석한 글을 쓸지, 이대로 둘 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장 구할 수 있는 원작 만화를 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글을 쓴 이유가 빠졌다. 이유는 간략하다. 추천의 사. 다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각자의 사고작용을 거친 뒤, 토론을 할 기회가 생겼으면 한다. 혼자서 한 번 보고 이해하기에는 이 텍스트의 무게감은 장난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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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 나이트, 진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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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습하자. Why So Ser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