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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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 Zenol

운명의 날

zeno 2007. 6. 30. 19:56

  두둥!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전군은 창검으로 무장하고 사루만의 탑으로 가라!

  가 아니고...

  사실 6월 30일이라는 운명의 날은 올해 2007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열아홉 인생의 정확히 한 가운데에 위치하였던 2006년 6월 30일을 의미한다.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기까지는 뭐하지만 그날 꽤 심각한 일이 일어났었으니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당시 때는 바야흐로 조홍진 님의 파리 입성 2일째 - 사실 전날 오후 늦게 파리에 들어와서 밤에 한 것이라곤 에펠 탑을 본 뒤 일몰을 보며 세느 강에서 유레일 패스와 엿 바꿔먹듯이 받아낸 무료 유람선을 타고 '와, 파리 좋다'를 연발한 것 밖에 없었다. - 였다. 당시 묵었던 민박 집에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결과 - 일행은 필자까지 세 명이었지만 숙고와 결정은 아마 전적으로 필자 혼자서 했었다. - 아침 일찍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가 모나리자를 비롯한 유명 작품들을 본 뒤 찬찬히 둘러보자는 대부분의 한국인 배낭여행객들이 현지 민박집 주인들의 조언에 따라 결정하는 전형적인 루트(!)를 선택하였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민박집에서부터 메트호를 갈아타가며 루브르에 도착한 것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정확히 그 날로부터 28일 전에 영화 '다 빈치 코드'에서 보았던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를 통과해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고, 그 와중에 시간이 30여 분 밖에 걸리지 않아 가히 최상의 시나리오대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수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만 17세 8개월 12일에 불과하였던 필자는 역시 만 18세 미만인 친구와 함께 무료 입장이라는 쾌거(!)를 이룩하여 88년 3월생이어서 눈물을 뿌리며 8유로를 내고 들어간 다른 친구의 배를 아프게 하였다.
  애초의 목표대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향해 질주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편인 상태에서 진품 - 사실 진품과 똑같이 만들어 놓은 모사품일지도 모른다. - 을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30여 분 쯤 뒤에 다시 가보니 이미 모나리자 주변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고, 그 광경은 필자가 루브르를 빠져나오던 시점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후 니케 상,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다비드 등의 명작 - 사실 더 많은데 1년이나 지나서인지 기억이 안 난다. 미안하다. - 을 관람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 역시 서두르길 잘 했군.
  한 두어시간 그렇게 한국인들의 '필수 코스'라고 불리는 루트를 섭렵한 뒤였을까, 어느덧 필자를 비롯한 친구들은 13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한 방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는 화장실에 들렀었고, 필자는 그 앞 벤치에 앉아 필자의 가방을 확인하고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필자의 가방이란 요즘에도 메고 다니는 북면사 - N모 페이스 있잖아! - 에서 나온 검은색 크로스 숄더백이다. 이 안에는 여권, 현금, 여행자 수표, 항공권, 유레일패스 - 유럽 배낭여행 5종 세트! - 가 모두 들어 있었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이라 해서 도난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모나리자 등의 유명 작품 앞에서 수시로 확인한 터였다. 다행히도, 그때껏 필자의 가방은 무사히 나, 여기 잘 있어요. :D 라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애초에 예정했던 시간은 아직 한껏 남아 있었기에 그 때부터 필자의 일행들은 루브르 각지를 활개치며 돌아다녔다. 간데 또 가고, 또 가고... 그렇게 한참 돌아다닌 뒤 1시 쯤이었을까, 이 정도면 되었다 생각한 필자들은 가장 가까운 출구를 향해 걸어나왔다. 출구를 10여 발짝 앞둔 순간, 필자는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가방을 확인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두뇌의 명령에 따라 등 뒤에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린 순간 필자의 눈에는 어느새 열려 있는 가방의 지퍼가 보였다. 그 순간 필자의 입에서 나온 말, "아, 털렸다..." 그렇게 필자의 여행 5종 세트 - 그 중 현금과 여행자수표를 합한 것이 300만원 가량 되었다는 점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 는 필자를 떠났다. 그 때, 필자의 전재산이라곤 지갑안에 있는 50유로짜리 지폐와 동전 몇 개, 그리고 민박집에 남겨둔 옷가지 배낭이 전부였다.

  사실 평소에 그렇게 주의깊은 필자가 그토록 무모하게 루브르를 활보한 데에는 다 사연이 있다. 벨기에에서 고속열차(!)로 유명한 떼제베(!) - 를 빙자한 통일호... 그건 절대 떼제베였을리가 없어! 그렇게 느린게 ㅠㅠㅠㅠ - 를 타고 프랑스에 들어가던 순간 유레일패스를 예매하며 받았던 복대가 끊어졌다. 여기서 복대란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우리 어머니들이 차고 계시는 그런 복대가 아니라 얇게 만들어져 몸에 밀착시킬 수 있고 옷 속에 찰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여행용 상품을 의미한다. 이 안에는 보통 앞에서 말했던 여행 5종 세트를 몸에서 나는 땀에 젖지 않게 비닐에 넣어 보관한다. 결국 그날 필자는 '역시 마데인치나는 이래서 안된다니까 ㅉㅉ'을 읊조리며 끊어진 금고를 필자의 크로스 숄더백 안에 보관하였고 그 상태로파리 체류 이틀 째를 맞았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 날 따라 아침부터 민박집 주인 누나와 다른 여행객들 사이에 루브르는 절대 안전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오가는 것이 거실에서 열심히 친구에게 메일을 쓰고 있던 필자의 귀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필자는 파리 도보 관광에서 절대 필요할리 없는 여행 5종 세트를 배낭에 고이 모셔두고 길을 떠났겠지만, 그 말을 들은 필자는 겨우 하룻밤을 잤을 뿐인 민박집도 믿을 수 없고 따로 떼어 놓는 것이 불안하기도 해서 복대가 들어있는 숄더백을 그대로 메고 루브르로 향하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아, 복대가 끊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운명의 날 아침 필자가 친구들처럼 꿈나라에서 헤메면서 그런 소리를 듣지만 않았더라면!
  이 포스팅을 작성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ㄲㄲㄲ
  사실 이 이후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한데 - 혹여 지금까지 흥미진진하지 않았더라면 ㅈㅅ. - 쓰다보니 길어져서 나중에 써야겠다. 후후, 1년 전 오늘을 기억하며. P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