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사랑/연상연하/죽음/생명] 본문

평 / Review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사랑/연상연하/죽음/생명]

zeno 2006. 12. 3. 15:34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푸른숲


  공지영 씨가 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줄여서 우행시, 참 아름다운 책이다. 사실 나는 영화로 이 책을 먼저 접했다. 이 책이 나온 작년 봄, 아버지께 생신 선물로 사드린 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다른 책에 밀려 내게 읽히지는 않았던 책이다. 그러던 차에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을 동생으로부터 들었고, 지지난주 금요일에 나온지 하루만에 은정 누나와 보았는데, 정말 슬프더라. 혼자가 아니라 같이 보는 사람이 있었기에 나름 참는다고 참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울어본 건 지난 달, 아니 벌써 지지난 달이구나, 8월 초에 태백산맥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울었던 뒤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울고 난 후, 소설에 대한 흥미는 다시금 생겼고 친구 녀석 생일 선물로 또 샀다가 주기 전에 내가 홀랑 읽어버렸다.
  책을 읽는 내내 영상이 계속 떠올랐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니 이런데,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폐해인지, 덕택인지... 여하튼 책 역시도 슬펐다. 일요일 하루, 집에서 뒹굴면서 읽은 탓에 가족들이 신경 쓰여서 대놓고 울지는 못했지만, 수차례 눈물이 느껴질 정도였다. 영화를 봤던 때처럼 삼양동 할머니가 윤수를 용서하겠다고 구치소에 찾아 갔을 때, 윤수가 마지막에 사형 당할 때 등...
주변 사람들은 내게 이 영화, 혹은 책이 재미있다고 했지만, 내게 '재미'라는 단어는 생소했다. '아련한 슬픔'이라는 감정을 갖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서 일까. 책을 읽고 난 후, 지금에서도 '재미'라는 말에는 '글쎄'... 이것도 재미있다고 하면 재미있을 것도 같지만, 솔직히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참 좋았다.'라는 말을 대신 하고 싶다.
  작가 공지영은 글을 참 잘 쓴다. 이 내용이 마치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양 독자를 착각하게 이끌법도 하고, 서른 살 여성의 입장에서 연하의 사형수를 대하는, 열 다섯살의 상흔 이후로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온 입장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묘사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까, 봉순이 언니의 내용이 잘 기억 나지는 않지만, 그 역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p.27

  나는, 이게 옳아요, 라는 확신과 신념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아마도 막연하게 그녀에게 질투를 느꼈을지도 모르겟다. 그건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을 두고, 설사 그것이 유치하고 어리석으며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결말로 끝난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을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막연히 질투를 느끼는 것 같다. 무언가 확신과 신념과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그래서 내가 정해진 삶을 거부하고, 비판도 아닌 비난을 하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서도 '어쩔 수 없잖아.' 혹은 '노 코멘트.'로 내 행동을 합리화하며 그들과 같은 길을 '소극적으로' 걸어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을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에서 찾고 있다. 그것을 못 찾아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거고. 오래 기다려 왔지만, 두 달 후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자신이 없다. 그걸 놓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두렵다. 몹시 두렵다. 그 것을 놓치게 되면, 난 더 표류하게 될 까... 나도 이제 그만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을 찾아 모든 것을 걸고, 더 큰 일을 위해 나아가고 싶은데...

  p. 158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럴 때도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안 돼.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는 걸, 그걸 놓치면 우리 모두 함께 죽어. 그리고 그게 뭐라도 죽음은 좋지 않은 거야...... 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나는 위선자다.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내가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미 성공한 인생은 아닌가 보다. 내 스스로 나는 위선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이야기 해버렸기에. 허나 뭐 그들은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테고, 신경도 안 쓸 테지.
  하지만 나는 때로는 위악자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것 같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관심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나는 스스로 상대주의자를 자처한다. '좋은게 좋은 거라고.' 다행히도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또 모순적인 것인가? 상대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절대주의에 집착하는.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내 스스로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보기도 하고, 생각해보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다행이다. 잘 살아야지. 죽는다는 것은, 그게 나이든 남이든, 내게 너무도 슬프고, 힘든 일이다. 날 위해서라도 오래 오래 살자, 그게 너이든 나이든.

  p.305
  "... 너는 뜨거운 사람이야, 뜨거운 사람은 더 많이 아프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하며 안 된다."


  나는 뜨거운 사람이다. 살아가면서 너무 많이 아프거든. 부끄럽진 않지만 아픈 건 힘이 든다. 이제 그만 아프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아프기 싫어서 차가워지려 한 건데, 아픈 건 계속되면서 차가워지기만 한 것 같다. 그래서 슬프다. 뜨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