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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성'으로 '진화'하다. 본문

저널 / Zenol

'소녀', '여성'으로 '진화'하다.

zeno 2007. 6. 13. 22:15

1. 시작하며

  작가 조해선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미술론 입문』의 레포트를 쓰기 위해 접근성이 용이하면서도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미술 전시회를 찾아 헤맸다 겨우 지난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세종갤러리 초대전으로 열렸던 그의 전시회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 가 본 세종갤러리는 실망스러웠다. 갤러리의 크기 자체도 지금껏 가왔던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8평 내외에 불과했고, 전시된 작품도 10여 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규모의 협소함은 오히려 전시장에서 별도의 큐레이터 없이 실제로 작가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작가에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작가와 단둘이 전시공간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무언가 그림에 대한 집중이 커지고, 작가와 교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가 조해선은 사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화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 감상은 아무런 선입견이나 지식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 비평문에서는 그 감상을 근거로 ‘비평’을 행하고자 한다. 참고로 그의 작품은 모두 유화로, 새 ․ 새 모양의 연적 ․ 꽃 ․ 호롱불 ․ 여성 등이 소재로 즐겨 사용되고, 다수의 작품의 배경이 큰 새의 모양으로 채색되어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2. 꽃과 새, 그리고 여성.

  그의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여성적 이미지’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사실 ‘여성적’이라는 것을 단정 짓는 것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일컬어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여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특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여성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 때, 조해선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꽃과 새의 이미지는 여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꽃은 예술에서 ‘여성’의 메타포로 많이 사용된다. 뿌리박은 곳에서 움직일 수 없고, 벌이나 바람, 새 등에 의해 꽃가루가 옮겨짐으로써만 수분이 가능한 꽃의 수동성이 ‘여성은 수동적이다’라는 오랜 사회의 통념과 비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꽃들을 여성과 연결 짓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한편, 조해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새 역시 여성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새들은 서예에서 사용되는 연적과 흡사한 모양을 띄어 작고 아기자기하다. 물론 큰 새도 일부 등장하지만, 단색의 배경으로 처리되거나 ‘평화의 새’로 익히 알려진 비둘기이기에 독수리나 매 등의 새가 주는 남성적 느낌과 상반되는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한편, 그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은 매우 독특하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집합적 발명』에서 쓴 바 있는 ‘이상한 만남’이라고 불리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 전치)의 일종이 모든 그림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해선의 그림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새 모양의 연적이 연꽃, 목련, 해바라기 등의 여러 가지 꽃들과 나란히 붙어있다. 이런 모습은 마그리트의 『집합적 발명』에서 인간의 몸과 물고기의 몸이 붙어있는 모습이 해괴하듯이, 역시 익숙한 광경은 아니다.

3. ‘여성’의 ‘진화’

  이번 초대전에서 전시된 작가 조해선의 작품 중 『소녀의 꿈』이란 작품과 『여인과 목련』이라는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꽃, 새, 그리고 여성의 이미지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면서 두 작품이 연작으로써 ‘연속선 상’에 놓여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유사점이 많다. 사실 두 작품 모두 올해인 2007년에 그려진 것이고 작가에게 문의하지 않았기에 제작 순서를 알 수는 없지만, 두 작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소재나 추측 가능한 주제의식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 작품이 일종의 ‘진화 전’ - ‘진화 후’의 단계를 드러낸다고 추측토록 강하게 유도한다.
  먼저, 『소녀의 꿈』을 보도록 하자.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다른 작품들에서도 즐겨 사용하고 있는 데페이즈망 기법과 ‘여성적 이미지’가 변주 ․ 반복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초대전에 전시된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작은 새의 형상은 『소녀의 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보는 이의 시선은 새 보다는 그 것의 부리와 연결된 꽃에 더 집중된다. 그의 다른 여타 그림에서도 그렇듯이, 꽃 부분에 가장 집중된 명암 처리와 원근법 효과는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집중해서 볼 만한 부분은 그림의 좌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한 소녀의 얼굴이다. 소녀의 앞머리로 가려진 눈은 보일 듯 말듯 하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의 표제인 ‘꿈’을 실제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이끌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눈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기에 답답하고 불편하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관객이 소녀의 눈에 집중하면서 몽환적인 느낌을 받는 동시에 ‘관음증’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묘한 감정의 공존은 남의 꿈, 그것도 소녀의 꿈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에 기인한다.
  꿈이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에서도 밝혀졌듯이, 무의식의 발현이다. 따라서 남의 꿈을 본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꿈을 말해주지 않는 한 남의 은밀한 무의식을 ‘훔쳐보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경험은 짜릿한 쾌감과 도덕적 불쾌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는 일찍이 마르셀 뒤샹이 자신의 작품 『etant donne』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하고자 장치를 설치하면서 보였던 방법이기도 하다. 남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은밀히 훔쳐본다는 것은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쾌감’을 안겨준다. 한편, 그렇게 누군가의 것을 훔쳐본다는 것은 스스로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불쾌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 현상은 사회에서 ‘관음증’이란 이름으로 죄악시된다. 즉, 『소녀의 꿈』이라는 표제와 그림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관객은 한순간에 ‘관음증 환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그 꿈이 ‘소녀’의 꿈이라는 점에서 쾌감과 불쾌감의 공존은 한층 커진다. ‘소녀’는 오늘날 가장 큰 ‘성적 판타지’의 대상 중 하나이다. 사실 소녀의 이미지가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 ‘로리타’라는 소설이 발간되고, 일본에서는 세라복을 입은 소녀를 욕망하는 ‘로리콘’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인터넷에서 소녀를 도촬한 각종 동영상이나 이미지가 범람한다는 것은 분명 사회가 소녀를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 역시 그 혐의를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위에서 분석한 바 있는 그림의 특성 뿐 아니라, 강렬한 붉은 색의 입술이 그림 전반을 지배하는 짙은 녹색 계열의 색과 색채대비를 이루어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그림에 나타난 사람이 ‘소녀’인지 아닌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림의 인물은 소녀가 아닌 젊은 여성이거나, 심지어 머리가 단발에 입술이 붉은 남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녀’라 규정한 그림의 표제에 의해 관객의 사고는 제한된다. 우리 역시 『소녀의 꿈』이란 그림을 보면서 당연히 그림의 주인공이 ‘소녀’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과연 소녀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다만, 작가의 표제처럼 그림의 인물이 소녀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만한 근거는 있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활짝 핀 꽃 옆에는 봉오리가 곧 터질 것만 같은 꽃의 ‘잠재태’가 존재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작가가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로 성인이 되기 직전의 소녀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한편 조해선의 작품 『여인과 목련』에서도 꽃, 새, 그리고 여성의 이미지는 다시금 변주 ․ 반복된다. 특히, ‘소녀’가 ‘여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녀의 꿈』의 변주나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화태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 심증은 그림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통해 굳어진다. 먼저, 꽃의 크기가 더욱 크고 모양이 화려해졌다. ‘꽃의 성숙’의 이미지는 예술에서 ‘여인의 성숙’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즐겨 사용된다.
  한편, 여성의 머리가 길어졌다. 한국에서 일반적인 ‘소녀’의 머리는 다니는 학교의 규정에 따라 길이가 정해져 있거나, 머리를 기르더라도 묶고 다니도록 제한된다. 그 결과, 대학이나 사회에 나와 ‘여인’이 된 소녀들의 다수는 머리를 기르고 푸는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 이미지는 『여인과 목련』에서도 관찰된다. 즉, 단순히 단발이었던 여성의 머리가 길어지는 것만으로 ‘소녀’가 ‘여인’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소녀의 꿈』에서는 둥글었던 턱선이 『여인과 목련』에서는 갸름해지고, 『소녀의 꿈』에서는 여성의 얼굴만 보였지만 『여인과 목련』에서는 상체가 부각된 누드화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의 인물이 ‘여인’이라고 인식하도록 더욱 강하게 세뇌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인’의 존재가 ‘소녀’보다도 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불편함은 보이지 않던 ‘시선’이 보이게 됨으로써 발생한다. ‘소녀’의 눈은 앞머리로 가려져 보일듯 말듯 했다. 그런데 소녀가 성장하여 ‘여인’이 되자 소녀는 한 쪽 눈을 드러내며 과감해졌다. 그림 속 여인의 시선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특히, 그 시선이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와 같은 미술 작품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전형적인 시선이 아니라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나타나는 시선이기 때문에 보는 이는 여인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한층 더 불편해진다. 특히, 이 작품을 이 글에서처럼 『소녀의 꿈』의 연속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본다면, ‘소녀’를 훔쳐보았던 관객은 다시 ‘여인’을 훔쳐보며 ‘쾌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특히, ‘불쾌감’이 ‘쾌감’보다 한층 강렬해진다. 여성의 시선은 단순히 응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보는 이를 무심하게 경멸하는 듯하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보는 이를 내리 보는 이 여인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한편 불쾌감을 안겨준다. 그 결과, 화사한 꽃과 새의 색깔에서 추동된 쾌감은 이렇게 여인의 시선 하나만으로 무참히 깨어진다.
  이렇게 ‘쾌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그의 그림은 관객에게 기존의 예술 감상에서 쉽게 할 수 없던 경험을 제공하여 보다 독특한 기분으로 감상을 지속하도록 이끈다. 단순히 불쾌감만을 제공한다면 관객들이 감상을 멈출 수도 있겠지만, 그의 그림은 분명 감상을 그만두지 못하도록 하는 매력이 있기에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관람을 지속하게 된다.
  한편, 그의 작품이 내는 그런 효과는 페미니즘에서 의도하는 기성 가치관에 ‘균열’내기에도 기여한다. 페미니즘에는 기성 사회의 완전한 전복에서부터 점진적 개선까지 다양한 흐름이 있지만, 모두가 기성 사회의 가치관에 균열을 내어 바꾸는 것을 의도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 조해선의 그림 『소녀의 꿈』과 『여인과 목련』은 저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여성을 그림에 등장시킴으로써 페미니즘적 저항에 기여한다.
 
4. 끝맺으며

  작가 조해선의 작품 『소녀의 꿈』과 『여인과 목련』에서 여성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양 작품 모두에서 나타나는 꽃과 새는 아기자기한 크기와 모습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한편, 구도의 형성과 시선의 분산을 통해 여성을 보다 부각시켜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두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림이 단순히 ‘쾌감’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불쾌감’까지 동시에 안겨준다는 점이다. 『소녀의 꿈』은 ‘소녀’와 ‘꿈’이라는 표제어에서부터 모순된 두 감정을 동시에 생성해내고, 그림의 이미지로 이런 느낌을 한층 더 강화해준다. 한편, 만개한 ‘목련’에서부터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여인과 목련』에서는 ‘쾌감’보다 더 큰 ‘불쾌감’을 안겨준다. 즉, 두 작품을 연속선상에 놓고 감상하는 행위는 보통 예술 감상에서 추동되기 쉬운 ‘쾌감’이나 간혹 발생하는 ‘불쾌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기보다는 양자 모두를 경험토록 만들어 기묘하다.
  사실 조해선의 작품세계는 단순히 이런 페미니즘적 분석틀로만 해석하기에는 모든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이상한 만남’ 형태의 데페이즈망 기법, 동양적 소재, 새와 꽃의 반복 등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새는 날고, 꽃은 피고』에서 나타나는 연꽃과 비둘기의 ‘이상한 만남’이나 『날개』 ․ 『새와 꽃』 등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효과는 마그리트나 에셔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여 ‘초현실주의’적인 색채도 분명하게 띈다. 그러나 분명 『소녀의 꿈』과 『여인과 목련』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지는 서사구조를 통해 연결되고 있고, 그 둘만으로도 한 여성의 ‘진화’ 과정을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수동적’인 ‘훔쳐보기의 대상’으로 취급되기 쉬운 여성의 저항적인 모습을 그림에 등장시켜 기성사회의 남성적 가치관에 깊이 물든 관객들에게 ‘쾌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이 때, 불쾌감은 쾌감보다 큰 한편, 그림을 감상하는 이의 기분을 크게 해치지 않을 정도에 그쳐 작품 감상의 맥을 끊지 않는 훌륭한 균형을 유지한다.
  이로써 작가 조해선의 미래는 필자에게 기대의 대상이 된다.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무명 화가’였던 그가 단 두 장의 그림만으로 페미니즘적인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일상에서 이런 ‘뜻밖의 수확’을 가져다 준 작가에게 작은 감사를 표하며, 미래를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