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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였을까, ‘돼지’였을까, 아니면 ‘돼지의 왕’이었을까 – 영화 <<돼지의 왕>> 본문

평 / Review

나는 ‘개’였을까, ‘돼지’였을까, 아니면 ‘돼지의 왕’이었을까 – 영화 <<돼지의 왕>>

zeno 2011. 11. 28. 23:25

찬다. 때린다. 돈을 뜯는다. 빵셔틀을 시킨다.

맞는다. 놀란다. 맞는다. 준다. 갔다 온다.

고개를 돌린다. 일어선다. 다가간다. 제지한다.

놀란다. 본다. 못 본 척 한다. 나가 버린다.

2000년대 초반 강북의 한 남녀공학 중학교 2학년 12반 교실에서 늘 일어나던, 혹은 일어날 만 했던 일이다.

계급 구조는 단순했다. 착취하는 자, 착취 당하는 자, 착취에 저항하는 자, 착취를 외면하는 자. 사회의 작동 기제는 '착취'였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어느 교사들의 단순한 생각의 결과. 전교의 모든 사고뭉치들을 한 반에 모아 다른 애들로부터 격리시키자! 아예 층을 달리 하여 1학년들과 같은 층으로 보내버리자! 사고뭉치들로 한 반이 구성되지 않으면 다른 반 구성하고 남은 것들 다 밀어 넣어버려!

그렇게 그 반으로 떨어졌다. 공부를 잘했고, 성격이 더러웠다. 착취 구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었다.

고까웠을 터. 한국에서 권력자들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손 중 하나가 건드렸다. 심지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사이 착취 구조는 보다 명확해졌고, 착취하는 자, 착취 당하는 자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이의 위치는 사실 부유와 다름 없었다.

수업 시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쉬는 시간, 갈등이 감지된다. 툭툭 친다. 옆에 앉은 아이의 돈을 빼앗아 간다.

점심 시간, 착취자의 식탁, 피착취자들의 식탁, 갈라진다. 무국적자, 대개 홀로 먹는다.

체육 시간, 착취자가 공으로 찌르고, 피착취자가 공을 막는다. 무국적자, 막고 또 찌른다. 사실 좀 애매하다.

시간이 지나며 무국적자의 주변에 사람들이 들어선다. 대개 무국적자거나, 피착취자다. 착취자, 쉬이 건드리지 못한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서 테니스 공을 찬다. 심심한 무국적자, 비굴하게 끼워달라고 한다. 착취자, 거드름을 피우며 끼워 준다.

쉬는 시간에 숙제를 한다. 착취자, 피착취자의 것을 탈취한다. 안 되면 무국적자의 것을 탈취하려고 시도한다. 실패한다. 무국적자, 요구한다. 네가 피착취자에게 요구하는 "형님"이라는 호칭과 "무릎 꿇기"를 내게 바쳐라. 그러면 내 수학 숙제를 하사하마. 착취자, 버티다 무릎을 꿇는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순간이다.

때로는 착취자와 무국적자는 어울린다. 하지만 종종 긴장이 흐른다. 무국적자, 착취자들의 동맹에 대해 버티기 때문이다. 착취자들,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무국적자가 피착취자들의 왕은 아니다. 피착취자들에게 잘 다가가지 않는다. 비루하다 여기는 걸까. 굴러 떨어지기 싫은 걸까.

1년이 지나고 구조는 해체된다. 다른 주체들에 의해 재생산되지만.

 

영화 <<돼지의 왕>>은 이 서사와 유사하게 흘러간다. 착취자는 '개'로, 피착취자는 '돼지'로. 다른 점은, 무국적자는 결국 '돼지'로 드러나고, 피착취자들을 규합하는 '돼지의 왕'이 있을 뿐. 10년이라는 시간과 강 너머라는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유사성은 그 자체로 자기반영적이라 깊이 몰입하게 한다. 아니, 이거 내 얘기잖아?

하지만 모두가 그 자체에 자기를 대입시키지는 않는다. 공학에서 여자들의 세계는 때로는 남자들의 세계와 조응하지만, 나름의 원리로 작동하기도 한다. 아마 어렴풋이 착취 구조를 느끼는 데 그쳤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저 구조는 '우화'로써의 아우라를 획득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다.

예산 제약과 그에 따른 그림에 대한 아쉬움을 서사로 관통한다. 단순한 권선징악도 아니요, 허무한 상대주의도 아니다. 반전과 함께 귀결되는 수작이다.

결국 마지막에 질문을 던진다. 넌 개냐, 돼지냐, 아니면 돼지의 왕이냐.

자칫 관객의 삶과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이 도발.

착한 사람의 가식을 벗어 던져라. 넌 개냐, 돼지냐, 아니면 돼지의 왕이냐.

애니메이션에서 구현되는 이 같은 급진성이 매력적이다. 압도적이다. 숨이 막힌다.

왜 그렇게 비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