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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스피넘랜드 법 이전의 것들, 스피넘랜드 법의 결과들 본문

ㄴ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제8장 스피넘랜드 법 이전의 것들, 스피넘랜드 법의 결과들

zeno 2009. 12. 27. 17:31
중상주의하 영국에서 노동을 조직하는 법령으로는 직인법과 구빈법이 있었다. 1563년에 만들어져 1795년까지 존속하며 국가 가부장주의를 대변했던 직인법은 전국적 노동 조직의 대강을 규정했다. 구빈법은 몸이 성한 빈민으로 하여금 지방 차원의 행정을 담당하던 교구의 통제에 따라 노동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이를 보충하였다. 빈민 구호는 지대 수입에 근거해 모든 이들로부터 징수된 빈민 구호 지방세rates를 통해 조달되었다. 참고로, 빈민이란 토지에 기반한 계급 외 전체라 할 수 있는 일반 민중과 사실상의 동의어로써 구호 대상 극빈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직인법과 구빈법이 합쳐진 노동법Code of Labor 체계는 전국적 노동을 가능하게 했지만 지방적 구호를 야기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다. 따라서 자주 구호 대상 극빈자들이 ‘더 좋은’ 교구로 몰려들곤 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 1660년에 정주( 및 퇴거명령)법이 도입되었다. 이는 인민의 직업 선택의 자유, 정착의 자유, 노동하지 않을 자유를 모두 박탈하는 조처였다. 그런데 1795년에 산업 측의 압력으로 인해 정주법이 부분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노동의 이동성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의 권리’를 내건 스피넘랜드 법이 도입되며 전국적 노동 시장의 등장을 방지하는 모순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스피넘랜드 법은 분명히 정주법 폐지로 인해 발생할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 이동으로 인한 체제 불안정을 막기 위해 시골 지주들이 만들어낸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빈민의 급증과 무역의 확대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았다. 빈민 급증의 이유로 여러 가지가 대두되었지만, 구빈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는 여론이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무역이 증대되면서 고용이 늘어나는 한편, 등락이 심해지면서 ‘산업 예비군’ 성격의 실업이 늘어난 것이 빈민 급증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산업 노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이 노동자를 바보로 만들어서 사고를 정지시키고, 이것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정도로 나아가 실업자가 되면 그야말로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경쟁적 노동시장이 등장하기 이전의 공장제 산업은 구호 대상 극빈자가 증대하는 한편, 임금 수준은 올라가는 모순적인 상황을 야기했다. 그 결과, 농촌은 실업의 증대로 인한 ‘사회 비용’을 치르고 도시의 높은 임금 수준을 부담스러워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법이 철폐될 경우 인구가 급작스럽게 빠져나가고, 도시의 패배자들이 돌아오는 등 사회적 혼란이 고스란히 농촌의 부담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스피넘랜드 법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는 구빈법 행정의 큰 퇴보와도 같았다. 1782년에 도입된 길버트 법이 교구 내 실업자가 타 교구에서 직업을 얻도록 알선해주고 임금 보조를 해주며 구빈법을 개선하고 있던 시점에서 이 모든 성과를 되돌려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토리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부담은 농촌의 중간계급이 전적으로 부담하게 되어 이들의 열악한 생활조건이 더 악화되었다. 물론 스피넘랜드 법으로 말미암아 농장 경영자들은 노동자 임금을 생계 수준 이하로 낮출 수 있게 되어 부분적으로 보상받았지만, 사실 빈민 구호 지방세 납부자 중 상당수가 아직 구호 대상 극빈자는 아니지만 이미 그/녀 스스로 빈민인 것이 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스피넘랜드 법의 가장 궁극적인 악폐는 노동자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파국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타의에 의해 스스로의 노동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없는 이들과 하나로 묶여버려 계급화에 실패했고, 이는 점차 이들이 그들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스피넘랜드 법의 철폐를 통한 전국적 노동시장의 확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업 사회와 함께 부상한 중간계급은 스피넘랜드 법을 철폐한 뒤, 과거로부터 내려져온 기독교적 사회 통일성의 관념을 잊고 자신들과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민족’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정치경제학은 이를 합리화하는 아주 좋은 도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