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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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09년 10월호) /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 / 로쟈

zeno 2009. 11. 7. 10:01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이란 질문에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답한 적이 있다. “아마도 중2 때 읽었던 듯하고 그때 요절했다면 ‘이 한권의 책’이 될 뻔했다”고 덧붙였다. 그때보다 훨씬 나이를 더 먹은 지금은 물론 ‘내 인생의 책’도 달라졌다. 하지만 충격의 ‘원체험’을 찾자면 아무래도 ‘수레바퀴 밑’으로 기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 읽은 세계문학전집판은 다시 구할 수 없기에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새로 번역된 책을 책상머리에 두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래서’보다는 ‘밑에서’가 더 강한 정서적 울림을 갖는다. 그 ‘밑’은 ‘밑바닥’의 ‘밑’이기도 하니까. 

더듬어 보면 <수레바퀴 밑에서>은 내 독서체험의 밑바닥이다. 성냥팔이 소녀도 죽고, 인어공주도 죽었지만, 그리고 <삼국지>에선 허다한 영웅호걸들이 비장하게도 죽고, 어처구니없게도 죽어나갔지만,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죽었을 때만큼은 슬프지 않았던 듯싶다. 헤세의 분신이었던 한스는 곧 나의 분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눈물까지 흘렸던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책을 읽은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의적으로 공부를 소홀히 했다. 그것이 죽은 한스에 대한 연대감의 표시이면서 ‘가정과 학교’에 대한 나대로의 반항이었다. 반항치고는 건전했다. 방과 후에 급우들과 탁구를 치러 다닌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한스만큼 허약하긴 했어도, 덕분에 한스처럼 신경쇠약에 걸리지는 않았다. 연이어 다른 책들을 읽은 것도 한스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헤세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국내에서는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 <데미안>에 대해서 나는 데면데면했다. 중학교 때 읽었는지 대학교에 들어와서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다. 하긴 이 책을 얼마 전에야 완독했으니 이전에는 읽은 게 아니라 읽다가 덮은 거였다. 두껍지도 않은 책을 그것도 몇 번씩이나 읽다가 그만둘 정도였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하다. 기억에 나는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등장하여 구해주는 대목까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건 똑같이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곤 하지만,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와 ‘한스 기벤라트의 이야기’는 뭔가 달랐다는 뜻이다. 

둘 다 성장기 소년의 이야기인데, 무엇이 다르다고 여겼던 것일까? 집안이 좀 달랐을까? 다시 책을 뒤적여보니 한스의 아버지 요제프 기벤라트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하는 인물로 결코 가난한 축에 들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뱅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졸부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하니까, 말 그대로 중산층이다. 싱클레어도 당시의 기준으론 중산층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론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무엇보다도 프란츠 크로머와 비교해보면 그렇다. 크로머는 술꾼인 재단사가 아버지였고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고 소개된다. 반면에 싱클레어의 집은 너무 밝다 못해 광채가 나는 세계였다. 

물론 <데미안>에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세계인가! 바야흐로 이 두 세계가 어떻게 맞닿아 있고, 어떻게 교차하며 그래서 어떤 사건들을 빚어낼는지 기대되지 않는가?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주한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사실 내가 <데미안>에서 읽고 싶은 건 그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이야기보다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와 이웃 아낙네들의 싸움판 이야기가 더 ‘소설적’이며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두 세계 사이에 낀 주인공을 다루는 거라면 싱클레어 대신에 하녀 리나를 주인공으로 삼아도 좋았겠다. 하지만 헤세는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나중에 크로머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지만,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 데미안에게 바로 제압당한다.  

소위 ‘교양소설’에서 주인공은 진정한 자기되기의 과정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이 아닌 것을 경험해야 한다. 노발리스의 말을 빌면, 거기서 근본적인 타자성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면 경험이란 단지 허울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싱클레어는 과연 그러한 ‘타자성’을 경험한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싱클레어가 꾸는 꿈은 시사적이다.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할 무렵 싱클레어의 꿈에는 크로머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환상은 크로머가 현실에서 저지르지 않은 것조차 꿈속에서 자행하게 했다. 그의 사주를 받아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을 자주 꾼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싱클레어에게서 타자 경험의 극대치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꿈) 속에서 이루어진다. <데미안> 전체의 이야기에 환상성이 짙게 드리워 있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데미안> 번역자의 한 사람이었던 전혜린은 “데미안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어떤 현실의 인간보다도 더 살아 있고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무엇이다.”라고 1960년대에 적었다. 이 평가는 곧 신화가 됐다. 그리하여 짐작에 전 세계에서 <데미안>을 가장 많이 읽는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이다. 하지만 나는 “독일의 전몰학도들의 배낭에서 꼭 발견되었다는 책,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의 마력이 여전히 미심쩍다. <수레바퀴 밑에서>와는 달리 <데미안>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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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지만, <데미안>은 특유의 환상성 때문인지 좀 어렵다. 그에 반해 <수레바퀴 밑에서>는 훨씬 더 직관적이고, 감정이입이 잘 되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글 전반부에 한스의 얘기와 그에 대한 로쟈의 대응은 곧 내 얘기이기도 해서 이렇게 옮겨 왔다. 서평이라고 해서 무조건 극찬하기보다 차라리 저렇게 솔직하게 쓰는 게 더 나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