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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시장 패턴의 진화 본문

ㄴ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제5장 시장 패턴의 진화

zeno 2009. 9. 16. 13:45

(물물)교환이라는 경제 원리는 이것을 전담하도록 만들어진 시장이라는 제도 - 기존 사회 제도와 달리 별도의 경제적 제도 - 를 통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 반면, 다른 세 가지 경제 원리는 기존 사회 조직이나 제도를 활용할 뿐이다. 이 같은 시장의 특징은 그것이 경제 체제를 장악하는 순간 사회 조직마저 압살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회 관계에 묻어 들어가 있던 경제가 도리어 사회 관계를 그 안에 묻어 들어가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에 고립적으로 존재하던 시장들이 뭉쳐져 하나의 단일한 시장경제를 형성하고, 이것이 자기조정시장이라는 담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당대인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은 사회에 인위적으로 밀어 넣은 것에 불과했다. 원시 사회에서는 화폐 없이도 시장이 존재했고, 시장이 없더라도 다른 경제 체제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의 발견은 기존에 정설로 여겨지던 분업 - 시장 - 화폐로 구성된 경제사적 논리를 반박했다.
  정설과 달리 시장의 기원은 외부에 있다. 원거리 무역의 결과 국내의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고, 이는 또 기존의 마을 장터와는 별도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한편, 원거리 무역은 본디 일방향적으로 존재하거나 쌍방향적이더라도 물물교환이 아닌 상호성의 원리에 기반한다. 평화로운 물물교환은 오직 강력한 원주민들이 약한 이방인들을 압박하여 강제적 평화를 조성한 경우나 ‘침묵무역’시에만 가능하다. 대외무역은 지리적 제약을 넘어 각 지역에 없는 물품을 공급하는 한편, 마을 장터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품의 교환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보완적이다. 따라서 이 둘은 경쟁적이지 않으며, 이 점에서 국내 시장과 대비된다. 국내 시장은 동질적 상품이 한 곳에 모이는 탓에 경쟁적이고, 이로부터 본격적인 시장 내 경쟁이 시작되었다.
  비록 사회에서 물물교환 원리가 존재할지라도 물물교환 행위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뿐, 다른 원리와 공존하는 탓에 상식과 달리 시장의 확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등가물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교환을 제한하는 사회학적 요소 - 법, 제도, 관습 등 - 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생각처럼 마을 장터로부터 시장이 발전하였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마을 장터는 그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시장의 작동을 보장하는 한편, 그 범위가 일정 한도를 넘어서지 않아 사회 관계를 위협하지 않도록 제한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도시였다.
  상업혁명이 벌어지기까지는 국내 교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자동맹의 활동 역시 제각기 존재하는 도시들을 연결하는 교역에 불과했다. 중세 도시는 마을 장터와 원거리 교역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에서 자신을 도시 외의 존재와 절대적으로 분리시켜서 체제를 유지했다. 그런 현실에서 중세 도시는 주변 농촌에는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원거리 무역에서는 결코 주도권을 가질 수 없었다. 특히, 도시는 식량 공급 등 도시의 생존을 결정짓는 문제에서는 이미 이윤에 따라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도매 상업화 된 원거리 무역의 특성 탓에 무력했다. 그래서 도시의 규제는 주변 지역에 한정됐다. 따라서 도시는 가능한 한 마을 장터와 원거리 교역을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이는 강력한 규제로 현실화되었고, 곧 전국적 시장의 등장을 막았다. 15세기와 16세기에 등장한 영방 국가territorial state는 중상주의 체제를 통해 기존의 중세 도시가 축조한 경제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제 시장경제는 강력한 국가의 규제라는 꼬리표를 달고 태어난 전국 시장이라는 전 단계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