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설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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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람의 일이란 / 김규항

zeno 2009. 1. 13. 17:31
2009년 오늘 한국에서 이명박 씨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범주는 꽤 넓다. '자본주의 이후'를 소망하는 좌파에서부터 '상식의 회복'을 말하는 자유주의자들까지, 최소한의 양식을 가졌다 자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얼굴만 봐도 진저리를 친다. 그들에게 '이명박'이라는 이미지는 악(惡)이라기보다는 추(醜)에 가까운 듯하다. 그런데 이명박 씨에게 진저리를 치는 그들은 정말 이명박과는 다른 사람들일까? 그들은 정말 이명박과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여러 사례가 있겠지만, 거창한 이야기 말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해보자.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고 0교시, 우열반, 보충학습 따위를 실시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이 우리 아이들 다 죽인다!"고 들고일어났던 걸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해온 것들이다. 고등학교 아이들은 8시 이전에 등교하지만 1교시는 8시 40분에 시작한다. 그 4~50분이 0교시다. 영어 수학은 '수준별 수업' 따위 이름으로 우열반이 공식 운영되며 '방과 후 특기적성'이라 포장한 보충수업은 상위권반이 따로 있다. 일 년에 네 번 보는 교육청 모의고사는 바로 일제고사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 가운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은 스스로 오랫동안 용인해온 일을 이명박 씨가 하려하자 그리 정색을 하고 들고일어난 걸까? 그러나 사실 이건 우리가 '교육문제'라 부르는 일 전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성토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 제 아이의 실제 교육에서 이명박의 교육과 차이를 보이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차이라면, 그들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이명박 쪽은 흔쾌한 얼굴을 한다는 정도인데,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그건 차이가 아니다.
사람이란 참 약한 존재라서 어떤 사회 체제 속에서 살아갈 때 그 체제에 조금씩 감염되는 속성이 있다. 그 체제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비판적인 사람도 완전히 그 체제를 거부하지 않는 한 다르지 않다. 민주화 이후, 혹은 김대중 정권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광풍이 가져온 여러 사회변화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건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자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정직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이어져 온 행복의 기준과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파괴되었다. 아이들이 사람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키워지는 풍경이나 이명박 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으로 뽑힌 건 그 자연스런 결과들이다.
결국 오늘 이명박과의 싸움은 두 이명박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내 밖의 이명박과 어느 새 내 안에 들어와 내 삶의 지배하고 있는 이명박. 두 이명박과 동시에 싸우지 않는 한, 아무리 뜨겁고 거대한 싸움을 벌인다 해도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내 안의 이명박이 세상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명박 씨를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한다고 해도, 결국 수많은 내 안의 이명박들이 모든 걸 되돌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 이명박 전선에 선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적이 한가하게, 혹은 맞지만 비현실인 이야기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명박과의 싸움이 너무나 긴박하기 때문이다. 그 긴박함을 당연히,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 긴박함이 내안의 이명박과의 싸움을 생략해도 좋을 만큼, 그래서 이 소중한 싸움을 헛수고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당연히, 함께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일이란, 참 간단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