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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상식의 이름으로 / 김규항

zeno 2009. 2. 19. 10:55
이명박 씨의 끝없이 이어지는 가공할 행태 속에서 '상식의 회복'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명박 씨의 행태가 제정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몰상식으로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몰상식에 대응하는 모든 태도 역시 하나의 보편적인 상식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몰상식이 종식되는 일은, 다시 말해서 이명박 씨가 물러나는 일은 과연 그가 물러나길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식의 회복일까?
정신적 고통이나 미감이 문제인 사람들, 얼마간의 문화자본을 가지고 주류사회에 걸쳐 생활하기에 이제나 저제나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명박 씨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쪽팔리고 짜증이 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상식의 회복이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누구보다 소리 높여 '상식의 회복'을 외친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이나 미감 이전에 생존 자체가 문제인 사람들은 경우가 다르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주요한 약자인, 그러나 노동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 상식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정규직과 같은 임금과 권리를 갖는 것일 게다. 이명박이 물러나면 그들의 상식은 회복이 되는가? 알다시피 오늘 비정규노동자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다. 더도 덜도 말고 땀흘려일한 만큼의 열매를 얻는 일이 상식의 회복일 농민들도, 신자유주의로 녹아나는 다른 많은 인민들도 마찬가지다.
보편적인 상식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의 처지에 따라 계급에 따라 상식은 다르다. 심지어 이명박 씨의 몰상식 역시 적어도 그 자신에겐 엄연한 상식이다. 세상은 상식과 몰상식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상식으로 나뉘며, 어떤 세상인가는 결국 어떤 상식이 세상을 지배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 유행하는 '상식의 회복'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해서 이명박 씨가 물러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들, 생존보다는 정신적 고통과 미감이 문제인 사람들의 상식의 회복인 셈이다.
자신에게나 해당하는 상식을 보편적인 상식인양 주장하는 건 매우 염치없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사실 그런 주장은 근대 이후 역사 속에서 단지 정신적 고통이나 미감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악의 세력이 최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장악하는 데 늘 사용되어 왔다. 그 주장은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들이 왕과 귀족으로부터 세상을 빼앗기 위해 인민을 동원할 때 사용되었으며, 김대중 씨가 군사 파시즘 세력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기 위해  수십 년 동안의 민중/노동운동의 성과를 독식할 때 사용되었으며, 그와 노무현 씨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면서 인민들의 시선을 수구기득권 세력에게 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지금 이순간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여름 촛불의 열기 속에서 대중들이 이명박과 바로 맞붙을 때 그 존재조차 잊혀진듯하던 민주당은 어느새 다시 멀쩡하게 야당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그 소중한 싸움의 성과를 야금야금 제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사용한 말이 바로 상식의 회복이다. 심지어 취임과 동시에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오늘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출발시킨 장본인인 김대중 씨가 '반이명박 연대'의 깃발을 세우면서 하는 말도 상식의 회복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이니 합리적 좌파니 하는 이들이 그 말석에 서며 하는 말 역시 상식의 회복이다.
싸움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소중한 싸움의 성과를 엉뚱한 놈들이 독식하는 슬픈 역사 또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른바 상식의 이름으로.